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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탄생시킨 88년 ‘파란만장’한 정치역정 집중조명
[사건의내막=이동림 기자] 3김 시대를 이끌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패혈증으로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른바 ‘서울의 봄’을 이끈 3김 시대를 이끈 주축이다.
지난 2009년 8월 18일 3김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이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 가운데 김종필 전 총리만 남게 됐다. 3김 시대는 1960년대부터 한국 정치를 이끈 주역이다. 무엇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영남권을 대표하는 민주화의 리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권의 정치거물로 민주화의 토대를 구축했다. 두 사람은 민주화 운동의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로 유명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장례는 국가장으로 거행될 예정이다.
김영삼은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통영군)에서 김홍조와 박부련 사이에서 1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통영중학교에 입학했고 1945년 경남중학교로 전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대통령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써놓기까지 했다.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장택상의 국회의원 총선거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였고 1951년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다. 김영삼은 1954년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28세의 나이에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3선을 확정하기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된 후 “이 당은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자유당을 탈당했다.
1955년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 민주당이 결성되자 입당했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부산 서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4.19 혁명 이후에 치러진 1960년 제5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했다. 1960년 12월 민주당을 탈당한 김영삼은 신민당에 입당했고 원내부총무에 발탁됐다. 이해 9월에는 거제군 집에 들어온 무장간첩에게 어머니 박부련 씨가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참여 요청을 거절했고, 1963년 군정연장이 발표되자 윤보선, 허정 등과 함께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했다. 이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제3공화국(1962~1972) 기간 동안 제1야당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거쳤고,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1969년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웠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었다. 1974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열린 당총재 경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선명야당론을 주장하며 유신 체제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979년 YH무역 사건 당시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기도 했으며, 이후 여당에 의해 의원직 박탈을 겪기도 했다.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 항쟁을 촉발해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됐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그의 발언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987년에는 김대중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했으나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패했다. 당시 김대중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의견일치에 실패했다. 이후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영삼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후 평화민주당의 약진으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다. 이해 4월 노무현을 정치계에 발탁했다.
하지만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전격적으로 ‘삼당합당’을 하여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세상을 놀라게 했고, 3당이 합쳐진 민주자유당의 대표로 취입했다. 이후 노무현은 그와 결별했다. 1992년 5월 19일 김영삼은 마침내 민자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다. 당시 대선은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이었다. 이해 12월 18일 제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꺾고 32년간의 군사정부를 마감하고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 집권 초기 개혁 드라미브와 부패 청산 정책을 펼쳤다. 군정 부정과 정통성 확립에 집중했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 수사와 신군부 처벌을 이끌어 냈다. 경제사적으로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도입은 큰 이정표로 기록됐다. 하지만 1997년 외환시장 악화와 함께 IMF 구제 금융의 수치를 겪어야 했고, 한보비리에 아들 김현철 씨가 연루돼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세계 주요 외신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리며 30년여 년의 군정을 종식한 첫 대통령이라는 평가와 재임 기간의 공과를 전했다. 중국 신화통신 및 AP통신 등은 국내 매체의 보도를 인용하거나 서울대병원의 공식 발표를 인용,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긴급기사로 보도했다. 이후 각국 외신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과 지난 1993년부터 1998년 재임 기간의 공과를 상세하게 전했다. <저작권자 ⓒ 사건의내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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