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고려-조선, 시대별 재판현황 공개

19세기 말 갑오개혁 때 첫 사법제 도입

이동림 기자 | 기사입력 2016/01/16 [20:50]

삼국-고려-조선, 시대별 재판현황 공개

19세기 말 갑오개혁 때 첫 사법제 도입
이동림 기자 | 입력 : 2016/01/16 [20:50]

 

▲ 원형옥은 둥근 모양으로 담장을 쳐 그 안에 옥사를 설치한 전통 감옥이다. <사진=대전지방교정청>

 

[사건의내막=이동림 기자] 우리나라에 근대적 사법제도가 도입된 것은 19세기 말 갑오개혁 때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상당히 훌륭한 사법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삼국시대가 성립해 중국식 법체계가 정비되기 이전의 초기 부족국가 시대에는 부족집회나 씨족의 장에게 재판권이 있었다. 부여만 해도 영고 집회에서 재판을 했다.

 

그 후 고구려에서는 부족장회의인 제가평의회가 국가의 최고법원이었고, 사소한 사건은 씨족회의에서 씨족장의 주재로 또는 부락공동체에서 자체적으로 재판을 했다. 백제는 고이왕 때에 중앙의 6좌평 가운데 형사 문제와 감옥을 담당하는 조정좌평을 두어 사법기관의 역할을 맡겼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도 일찍부터 지방관이 재판권을 행사했으며 수시로 염찰사를 파견하여 송사를 감독하게 했다.

 

고려 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중앙의 재판기관으로서 의형대를 두어 법률에 관한 사항과 재판을 관장하도록 했다. 이것을 추관·형관·전법사 등으로 고쳤다가 후에 형조로 바꾸었고 조선조까지 계승되었다. 서울인 개성에서는 개성부윤이 공양왕 때부터 모든 민사사건을 재판했고, 지방은 수령인 유수관·부사·지주·현령·감무 등이 제1심 재판을 했으며, 안염사·관찰사가 제2심 재판기관이었다. 각 도에 파견되는 안무사 또는 순무사·염문사도 민사사건의 상급법원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재판제도는 더욱 정비되었다. 오호택의 저서 <법원 이야기>를 보면 지방수령인 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이 일체의 민사재판과 태형 이하에 해당하는 경미한 형사사건을 처리했고, 각 도의 관찰사(감사)는 지방수령의 민사재판에 대한 상소심과 유형(유배 보내는 것, 귀양) 이하의 형사사건을 제1심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또한 암행어사도 지방관을 대신하여 재판을 하여 일종의 부정기 순회법원의 역할을 했다. 관찰사에 대한 항소(의송이라고 함)에서 지면, 중앙의 육조 중 하나인 형조에 상소할 수 있었다. 형조는 법률과 형사소송·민사소송을 담당하여 사법행정을 감독함과 동시에 수령이 관장하는 일반 사건의 상소심으로서 합의체 재판을 했다. 즉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와 대법원의 일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 밖에 중앙의 사법기관으로서 억울한 형벌을 밝혀 주던 사헌부, 호적 및 부동산 관련 소송을 관장하던 한성부, 왕족의 범죄나 반역죄 등을 담당하던 의금부가 있었다. 1894년 하반기부터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재판이 폭주함에 따라 형조와 의금부를 통합·개편하여 법무아문 산하에 '법무아문권설재판소'를 두고 재판사무만을 전담하게 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최초로 재판소라는 기구가 생겨났다.

 

이듬해 을미개혁의 법률 제1호로 공포된 재판소구성법은 제1심 법원으로 지방재판소, 한성 및 개항장재판소, 특별법원을 두고, 제2심 법원으로 순회재판소, 제3심 최고재판기관으로 고등재판소 등 5종의 재판소를 두도록 규정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최초의 근대적 재판기관인 한성재판소가 설치되었고, 1899년에는 고등재판소가 평리원으로 개편되었다.

 

그런데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사법행정 사무에 관여하고 재판소에 일본인 판·검사 및 보좌관을 배치하기 시작했으며, 1909년 10월 31일에 이르러서는 대한제국의 각급 재판소, 법부 및 감옥이 모두 폐지되어 통감부에 흡수되고 말았다.

 

<출처=법원 이야기(오호택)>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스타화보
배우 서인국, 섹시하고 관능적인 화보 A컷 공개! ‘어른 멜로 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