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와 중세 피렌체 3대 가문 이야기

“상업 활동과 동맹, 그리고 중세 가문의 운명”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5/21 [09:21]

메디치가와 중세 피렌체 3대 가문 이야기

“상업 활동과 동맹, 그리고 중세 가문의 운명”
이일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5/21 [09:21]

인류사에서 중세(Middle Ages)에 대한 정의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에서부터 동로마 제국(비잔틴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1453년에 이르는 시기를 크게 중세의 시기로 파악합니다. 전문적인 입장에서는 더욱 복잡한 계산이 따르지만, 보편적으로 1050년에서 1300년을 전후한 시기를 중세시대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세의 터널을 벗어난 이탈리아 르네상스 하면 바늘과 실처럼 따라붙는 메디치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파악은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요구합니다.


남부 이탈리아 무대로 포도주·올리브유 무역 바르디
은행업과 함께 선구적인 물류시스템 구축했던 페루찌
서유럽까지 많은 은행가지고 있었던 부자 아차이올라
전쟁 아픔 딛고 살아남아 훗날 메디치가와 다시 인연

 

▲ 바르디 가문 문장 산타 크로체 성당 바르디 예배당(Bardi Chapel)의 조토 작품 

 

시대적으로 귀족이라는 지배 계층이 아닌 평범한 집안에서 금융업과 상업으로 출발하여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인문과 예술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긴 가문은 인류사에서 메디치가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바르게 파악하려면 메디치 가문의 바탕인 메디치 은행이 설립된 1397년을 전후한 대표적인 상업적 활동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에 피렌체 도시와 지중해 영역은 물론 유럽 전역을 무대로 활동하였던 중세 시대 피렌체 3대 상업 가문이었던 바르디 가문(Bardi family)과 페루찌 가문(Peruzzi family) 그리고 아차이올리(Acciaioli family)가문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바르디 가문


먼저 메디치 은행의 2대 주인인 ‘대코시모’의 부인 ‘콘테시나 바르디’(Contessina de' Bardi, 1390~1473)의 집안인 바르디 가문(Bardi family)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바르디 가문의 역사는 9세기 후반으로부터 시작되어 10세기에 피렌체 인근으로 이주하여 1282년 피렌체 문서 기록에 바르디 가문의 바르톨로 드 바르디(Bartolo de' Bardi)라는 인물이 처음 등장합니다.


이후 1332년 메디치가의 조상이 살았던 무겔로 지역에 많은 토지를 매입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 1427년에는 피렌체 베키오 다리 인근에 카니기아니 궁전(Palazzo Canigiani)에 거주하였습니다.


‘대코시모’의 부인 ‘콘테시나 바르디’의 친족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은 여러 기록이 오류를 시정하지 않고 지속되어 필자가 확인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해 봅니다. 바르디 가문의 소조 바르디(Sozzo de Bardi)와 부인 우바디니(NNUbaldIni)는 조반니 바르디(Giovanni de'Bardi,1360~?)와 시몬느 바르디(Simone de' Bardi.1262~?) 그리고 알렉산드로 바르디(Alessandro deBardI) 이렇게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이중 ‘조반니 바르디’가 판노치에치(Pannocchieschi) 가문의 에밀리아드 바르디(Emilia DE BARDI,1365~1394)와 결혼하여 ‘콘테시나 바르디’(1390~1473)를 낳은 지 4년 만에 2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조반니 바르디’는 나나도비치(Nanna Dovizi)와 재혼하였습니다. ‘대코시모’의 부인 ‘콘테시나 바르디’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부정확하게 전해져온 이유는 4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기록에 대하여 당시 세상의 중심에 있었던 ‘대코시모’ 부인의 어머니에 대한 불행한 이야기를 누구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가야 할 내용이 13세기 대표적인 이탈리아 시인 ‘단테’(Dante,A, 1265~1321)의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Beatrice, 1264~1290)가 바로 바르디 가문과 결혼하였던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에게 바치는 헌시의 작품인 신곡에서부터 단테 문학의 영감과 감성의 근원이었던 ‘베아트리체’(1266~1290) 가 바로 ‘대코시모’의 부인 ‘콘테시나 바르디’의 아버지 형제인 은행가이었던 시몬 드 바르디(Simone dei Bardi,1262~ ?)와 결혼하여 2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르디 가문 두 형제의 부인이 모두 요절한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중세 피렌체의 대표적인 상업가인 바르디 가문은 남부 이탈리아 영역과 시칠리아 섬을 무대로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무역하며 힘을 키웠습니다. 이후 1290년 무렵 피렌체의 경쟁적인 사업 상대이었던 페루찌 가문(Peruzzi family)과 앞을 다투어 영국지사를 설립합니다. 이는 바로 양모 사업으로의 진출을 의미합니다.


당시 가장 수익성이 좋았던 모직의 수출입으로 거대한 부를 이룬 이들은 양모의 주 공급원이었던 영국과 지리적 요건이 좋은 벨기에 지역 플랑드르는 물론 유럽 여러 지역에 양모 공급권은 바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노르만정복으로 이동한 양모기술자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피렌체에 시작된 양모 산업의 규모가 점차 늘어나게 되자 상업적인 감각으로 영국진출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의 선구적인 활약이 피렌체가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서게 된 성장의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모이는 곳에는 그 무엇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긴박한 상황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세계를 뒤흔든 풍운과 몰락으로 뒤엉킨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이어가기로 합니다.

 

▲ 디가, 아치이올리가, 페루찌가의 흔적



페루찌·아차이올라


영국에서 생산되는 양모를 플랑드르 지역에서 모직으로 가공한 직물은 중세 최고의 산업이며 인기 상품이었습니다. 이러한 양모의 공급원인 영국을 상대로 하는 막후 경쟁이 전쟁과 같았습니다.


당시 피렌체의 대표적인 3대은행 가문이었던 바르디(Bardi family)와 페루찌(Peruzzi family)가 1290년경 영국 지사를 설립한 이후 원활한 양모공급이 이루어져 피렌체에 주요 산업으로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바르디 가문에 이어 페루찌 가문(Peruzzi family)에 대하여 요약하여 살펴봅니다, 페루찌 기업은 여섯 명의 가족이 회사를 설립하여 각기 다른 업무를 담당하며 은행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페루찌 기업은 은행업과 함께 선구적인 물류 운송시스템을 구축하여 운송사업을 운영하면서 교황청과 각 나라의 외교적인 재화와 상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열악한 통신 수단으로 고급정보 수집에 가장 근접한 이점을 가져 사업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업적 바탕으로 페루찌 은행의 규모는 1330년경 영국을 기점으로 중동 지역까지 15개의 지점을 가진 유럽 2위의 은행 가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페루찌 가문은 주요 도시에 지점이 만들어진 거점을 활용하여 직물 수출입 사업과 나폴리 지역의 곡물 수출사업까지 독점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플랑드르 지역에서 가공된 고급 직물과 나폴리의 곡물들을 페루찌 기업의 특화된 운송시스템을 통하여 유럽은 물론 중동에까지 수출하며 돌아오는 운송편에 동방의 실크와 향신료 그리고 다양한 고급상품들을 유럽 전역에 공급하는 사업으로 성장의 가도를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렇듯 페루찌 기업은 각 나라와 교황청의 특정한 물류와 자금들을 운송 관리하면서 지켜져야 하는 보안과 비밀스러운 내용을 특수한 장부시스템으로 기재하게 되어 페루찌 은행의 회계장부 시스템이 피렌체 주요 은행들의 이중장부 시스템으로 활용되었던 바탕이 훗날 메디치가에 의하여 논리적인 복식부기의 서양 최초의 사용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당시 가장 큰 규모의 은행 기업이며 상업가문이었던 바르디 가문이 영국의 왕권과 가장 긴밀하였던 내용에서 운송 물류에 특화된 페루찌와 담합하여야 할 내용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는 서로가 경쟁 기업이면서도 함께 컨소시엄을 이루어 영국왕실과 나폴리왕국에 많은 자금을 대출하게 되었던 사실이 이를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당시 피렌체의 3대 기업가 가문이었던 아차이올리 가문(Acciaioli family)에 대한 내용도 짚고 가야 할 내용입니다. 이 가문의 창시자 ‘아차이올리’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인근 브레시아에서 1160년 피렌체로 이주하여 구엘프(Guelfi)파 회원 기업가로 정착한 피렌체 상업사에 가장 선구적 인물입니다. 10세기 초 흑인이었던 헨리 왕조의 공작에서 시작된 벨프 에스테 왕조(Welf-Este)와 연관된 ‘아차이올리’는 시칠리아의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을 독점적으로 취급하여 이탈리아 남부 도시에서 서유럽까지 많은 은행을 가지고 있었던 부자이었습니다.


‘바르디’ ‘폐루찌’와 함께 피렌체 3대 기업으로 성장하였으나 1334년 3대 기업이 동시에 파산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훗날 메디치가와 제휴하여 1388년부터 146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아테네 공국을 통치하는 세력으로 다시 살아난 가문입니다. 훗날 후예들이 포르투갈에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 브라질에 사탕수수를 최초로 재배하게 하였던 가문입니다.


이와 같은 3대 피렌체 기업 가문이 함께 동맹하며 사업을 이끌어간 내용은 1325년경부터 절정에 이른 나폴리왕국과 피렌체의 갈등과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이 고조된 시대 상황에서 기업의 생존을 위하여 정보와 자금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때 삼대 기업이 서로 컨소시엄을 이루어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막대한 자금을 빌려준 내용이 1934년 3대 기업의 동시 파산이라는 결과로 이해되지만, 이는 사실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당시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영국의 에드워드 3세 왕에게 대출한 바르디 은행의 90만 플로린과 페루찌 은행의 60만 플로린이 3대 기업이 동시 파산될 정도의 규모로 보기엔 당시 유럽을 지배한 3대 기업의 경제적 규모에 논리적 성립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내용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모직산업의 메카 플랑드르가 프랑스령 자치도시로 원재료의 공급자인 영국과 프랑스에 얽힌 막후의 배경이 결국 1347년 백년전쟁으로 표면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 발발 3년 전인 1334년에 유럽경제를 좌우하던 피렌체 3대기업의 동시 파산이라는 사태를 맞게 된 내용을 바탕으로 상업가의 생존을 위한 절묘한 감각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이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 1252년 피렌체에서 발행된 금화 플로린(Florin) 

 

3대 가문의 운명


1344년 피렌체 3대 기업 가문인 바르디가문과, 페루찌가문, 그리고 아차이올리가문이 동시 파산한 내용은 많은 여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렌체에 거점을 두고 있던 3대 가문은 유럽 전역에 은행과 무역회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십자군 전쟁 이후 활성화된 교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하였습니다. 가문들은 저마다 특정한 상품에 주력하였지만, 은행과 무역업이라는 같은 업종의 경쟁적 입장에서 기업 동맹 형태로 경쟁과 연합을 주고받았던 이례적인 정황이 많은 까닭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합니다.


먼저 인류사의 가장 치열한 종교전쟁 십자군 전쟁을 살펴봅니다. 십자군 전쟁은 1096년에 시작되어 1270년경 종료된 세계사에서 가장 긴 300년간의 전쟁입니다. 예루살렘 성지의 탈환과 수성이라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전쟁으로 유럽 전역에서 연합한 나라의 다양한 계층의 기독교도 십자군이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으로 인한 상품의 필수적인 증가로 교역량이 많이 늘어났지만 주요한 육상 운송로가 단절되는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또한, 지중해역이 막힌 이유로 발트해로 우회하는 북유럽 항로가 새로운 운송길로 활용되면서 거점 도시 독일로 새로운 교역권이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십자군 전쟁 말기인 1267년을 기점으로 북유럽과 독일의 주요 운송로를 거치게 되는 거점 도시들과 상인들이 운송로의 독점적 확보와 안전을 목표로 도시동맹이거나 한자동맹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300년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세계사에 극히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동로마제국(비잔틴 국)에 요새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의 어이없는 함락입니다.(이러한 십자군 전쟁과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당시 동로마제국(비잔틴 국)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각 분야의 우수한 기능인들이 불안정한 나라를 떠나 여러 도시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때 직물 장인들과 염색 장인들이 피렌체로 이주하였을 개연성이 많습니다. 시기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라틴제국이 건립된 이후 피렌체에서 양모의 단순 가공에서 직물가공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염색 산업이 시작되었던 정황이 파악되기 때문입니다.


본디 이집트로 가야 했던 4차 십자군이 베네치아 공국의 음모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해버린 사건으로 교황권이 약화하면서 4차 십자군을 주도하였던 프랑스 왕이 교황청을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자신의 지배하에 놓은 ‘아비뇽 유수’ 가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지속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와중에 1315년 서유럽에 초유의 대홍수가 일어나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는 가운데 경제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대홍수 다음 해인 1316년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경제는 더욱 침체기를 갖게 되면서 이를 회복할 즈음 당시 피렌체 공화국은 1325년 나폴리왕국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당시 바르디와 페루찌 은행이 나폴리왕가에서 요청한 대출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상당한 대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후 1330년부터 3년간 피렌체에 유례없는 가뭄이 들었습니다.


또한, 다음 해 1333년에는 피렌체 도시에 사상 초유의 대홍수가 일어나 피렌체 도시를 강타하여 피렌체는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의 영국과 프랑스의 물러설 수 없는 백년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252년 피렌체에서 발행된 금화 플로린(Florin)은 가장 정통한 가치로 만들어진 서유럽 최초의 금화로 유럽 전체의 기축 통화로 통용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은행들이 유럽에 거점을 구축하면서 당시 가장 막강한 은행이었던 시에나 도시의 대표적인 은행 가문인 ‘본시뇨리가문’이 1298년 파산하게 됩니다. 이에 오랫동안 유럽 금융의 중심으로 있던 시에나에서 피렌체로 그 중심이 이동하면서 피렌체의 은행 가문이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에나 은행 가문 파산 이후 45년 만에 다시 피렌체 3대 은행이 파산한 시대 상황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와 영국의 두 왕이 요청한 전쟁 비용의 대출을 거절할 수 없었던 많은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바르디와 페루찌 두 가문 모두 양모와 모직물 수입에 관하여 절대 권한을 가진 영국 왕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피렌체 3대 가문 모두가 교황청과 연관된 물류와 상품거래는 물론 은행 업무까지 그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져 프랑스 왕의 권한이 강화된 사실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기에 세 가문이 협약하여 서로가 지급 보증을 서면서까지 두 왕의 요청을 해결하였을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메디치가와의 인연


이러한 대출은 모두 무담보로 이루어진 것으로 끝없는 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대출이 겹치면서 1344년에 유럽 최대 은행 바르디은행이 파산하였으며 연이어 페루찌 은행도 파산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아차이올리 은행도 연이어 파산을 선언하여 피렌체 3대 기업가 가문이 함께 파산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아차이올리 은행은 전쟁비용의 대출은 없었지만 취약한 피렌체 중소기업에 대출하여 바르디와 페루찌의 파산이 가져온 충격으로 함께 파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페루찌 은행의 투자자이며 페루찌 은행의 전문 경영인으로 일하였던 조반니 빌라니(Giovanni Villani)는 훗날 저술한 책에서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였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 왕이 바르디은행에서 대출한  900,000플로린 과 페루찌 은행에서 대출한 600,000 플로린이 파산의 원인이었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중세 유럽의 경제권을 흔들었던 피렌체의 3대 기업가 가문이 전쟁이라는 인류의 재앙으로 인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파산을 선언한 세 가문은 전쟁의 아픔을 딛고 살아남아 훗날 메디치가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던 사실에서 전쟁이 주는 역사적인 교훈을 되새기게 합니다.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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