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첩보 기관이었던 OSS가, 국가 안전보장법에 의해 대외 첩보기관 CIA로 개편된다. 그리고 ‘페이퍼클럽’의 소속 일부 이원들 역시 CIA에 편입돼 일하게 된다. 그리고 1951년 미 육관과 CIA 부사관들을 대상으로 화학물을 이용한 심리 조작 실험을 한다. 여기에는 나치 독일 출신의 과학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이 실험의 이름은 ‘MK-ULTRA’로 불리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구소련의 발달한 세뇌기술에 대응하고자 만든 ‘파랑새 Bluebird 비밀 풀그림’이란 조직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MK-ULTRA’ 프로젝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구소련에 대한 첩보 작전보다는 ‘어떻게 하면 한 개인을 통제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마인드 컨트롤을 위한 화학적, 생물적, 그리고 방사선학적인 약제를 제조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 ▲반전 활동을 벌인 존 레논 <사진출처/영화 '존 레논 컨피덴셜'의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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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험이 시작된지 19년이 지난 1980년 12월 8일.
한 남성이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집 앞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망한 남성은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반전운동을 벌이던 존 레논. 그를 38구경 리볼버 총으로 4발을 쏴 사망케 한 이는 마크 채프먼이란 인물이었다.
사건 발생 당일 전부터 마크 채프먼은 존 레논의 집 주변을 서성였다. 그의 모습은 존 레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던 한 사진작가에 의해 포착된다.
이 사진작가는 존 레논을 찍기 위해 뉴욕 웨스트 71번가로 향하던 길에 “며칠째 존을 기다리고 있다”는 마크 채프먼을 만나게 된다. 오후 4시경 존 레논이 나타나자 사진작가는 사진을 플레쉬를 터뜨렸고, 마크 채프먼은 존 레논의 사인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일반 팬들과는 달리 마크 채프먼은 사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존 레논의 집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존 레논의 집 근처를 서성인지 6시간이 된 오후 10시경. 존 레논과 그의 아내 요코가 다시 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낮과 달리 팬들도 사진작가도 없었다. 존 레논, 요코, 마크 채프먼 셋뿐이었다. 그리고 네발의 총성이 들렸다.
총에 맞고 쓰러진 존 레논을 끌어안고 요코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피가 튄 거리, 여성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저지른 마크 채프먼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일어나 외투에서 책을 한권 꺼내 읽었다. 책의 제목은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경찰이 출동해 그를 체포할때까지 마크 체프먼은 침착하게 서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
경찰은 “당시 마크를 보았을 때 ‘기계적인 프로젝트화 된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이런 경찰의 주장은 마크 채프먼의 아내의 증언에서도 반복된다. 일본인 3세인 마크의 아냐는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부터 남편은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인 부분이 있었다”면서 “사건이 발생하던 해의 가을, 남편이 집에 오는 길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사오는 것을 보았다”고 밝혔다. 이어 “책을 사온 남편이 ‘내 이름은 홀든(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으로 바꿔야돼’, ‘존 레논은 사기꾼이야’라는 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마크 채프먼의 변호를 의뢰받은 변호사는 “처음 그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당시 존 레논이 자신을 지나치자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시작해’, ‘시작해’라는 목소리가 반복해 들려왔다고 진술했다”면서 “사실 변호인 입장에서는 정신 이상을 부각해 무죄를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정황을 종합해 언론은 ‘비틀즈와 존 레논의 광팬이었던 마크 체프먼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마크 체프먼이 비틀즈는커녕 존 레논의 팬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마크의 고교시절 친구는 “마크는 락을 좋아했고 토드 룬드르렌의 열성팬이었다”면서 “음악 이야기를 할 때 비틀즈나 존 레논을 주제로 이야기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마크의 지인은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록을 좋아했다”면서 “존 레논에 대해 관심 자체가 없었다”고 당시 언론을 통해 발언하기도 했다.
당시 이를 취재했던 한 기자는 “사건이 제대로 된 해명없이 마무리가 지어져 납득할 수 없어 따로 취재를 진행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나는 마크는 존 레논도 ‘호밀밭의 파수꾼’의 팬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세뇌되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고 밝혔다.
이어 “그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은 바로 CIA가 오래전부터 진행해온 ‘MK-ULTRA’라는 최고 기밀의 프로젝트 때문”이라면서 “이 실험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상이 됐다. 마크는 이 기밀 프로젝트에 이용된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 체프먼은 이후 감옥에 있는 동안 마크는 자유롭게 외부인과 연락을 취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마크가 CIA의 비밀 요원이 정기적인 통화를 통해 재판을 포기하게 다시 세뇌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마크 체프먼이 1975년 YMCA의 국제 캠프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점도 ‘MK-ULTRA’의 희생양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곳은 당시 CIA가 연결책을 잠입시키던 곳 중 하나였다. 마크는 청소년기에 마약류에 중독된 적이 있었는데, 그 물질이 LSD였다. LSD는 바로 CIA가 이 프로젝트에 가장 즐겨 쓰던 약물이었다. 당시 미국의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마크는 무장 경비원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권총 훈련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고, 1977년 부모의 이혼 때문에 차량 안에서 자살을 시도할 만큼 심적으로는 취약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미국 CIA가 마음이 약하지만 총기 사용 능력이 우수한 마크 체프먼을 자신도 모르게 ‘MK-ULTRA’에 참여시켜 존 레논을 죽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CIA가 왜 마크를 이용해 존 레논을 죽이려 한 것이란 의문점이 남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존 레논이 미국에 몰고온 반전 운동 때문에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실제 존 레논은 정치에 열정적이고 반정부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존 레논이 주장했던 반전 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미국 정부는 그를 “부정적인 사람”, “극단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존 레논과 미국 정부와의 갈등은 닉슨 대통령때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The Republican National Convention’에서 ‘쓰레기 같은 닉슨 버리기’ 콘서트를 개최하려고 하는가 하면 자신을 추방하려는 정부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닉슨 사임 이후 그는 미국에서 과거와 달리 생활할 수 있었지만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자 또 다시 갈등을 겪게 된다.
존 레논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은 “당시 TV, 라디오 등의 보급으로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면서 “하지만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매체에 노출 될 수 있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존 레논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실제 레이건의 참모들은 이를 우려했고, 그의 취임 직전 이런 일을 벌이기로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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