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흑금성 실제인물이 털어놓은 내밀한 첩보세계

박채서씨 스토리 도서 ‘공작’으로 엿본 북파공작원 성공담·실패담 영화보다 ‘흥미진진’

김혜연 기자 | 기사입력 2018/08/24 [11:20]

‘공작’ 흑금성 실제인물이 털어놓은 내밀한 첩보세계

박채서씨 스토리 도서 ‘공작’으로 엿본 북파공작원 성공담·실패담 영화보다 ‘흥미진진’

김혜연 기자 | 입력 : 2018/08/24 [11:20]

대북공작의 한계 체감 후 대북 사업가 통해 북한 직진로 개척

김정일이라는 최고 공작목표에 성공하고도 첩보원 신분 박탈

 

 최초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난 북파 공작원 박채서씨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 영화 ‘공작’의 관객수는 개봉 15일 만인 지난 8월24일 기준으로 434만 명을 돌파했다. 무서운 기세로 1위를 달리다가 ‘목격자’에 밀려 1위 자리는 넘겼지만 여전히 하루 9만 명 안팎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며 흥행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흑금성(황정민 분)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파헤치던 안기부 스파이가 남북 고위층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감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실화를 다룬 것인 만큼 더 흥미롭다. 적대적 공생 관계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남한과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고 있는 북한이 시대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박씨의 이야기를 그린 언론인 김당씨의 책 <공작>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중 공작원 흑금성의 육필수기를 토대로 촘촘하게 취재해 재구성한 만큼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중스파이 박채서씨와 그의 비밀공작 파일이 잘 녹아 있다. 지난 7월25일 서점가에 등장해 영화만큼이나 화제를 모으고 있는 도서 <공작>(이룸나무)을 바탕으로 박채서 씨의 긴박한 첩보세계를 간추려 소개한다.

 



2018년, 이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인가? 남북 정상이 지난 4~5월 두 차례에 걸쳐 판문점회담을 하고, 6월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이 테이블에 함께 앉는 역사적인 장면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2018년 여름, 한반도를 둘러싼 이러한 대변혁 분위기를 읽는 데 도움이 될 주목할 책이 서점가에 등장했다. 1990년대 북한 핵 관련 첩보공작을 펼치던 대북 스파이 흑금성의 수기를 바탕으로 한 <공작>이 바로 그 책이다.


99%의 사실과 1%의 허구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나라 첩보공작 역사상 최초로 국정원의 창(槍, 첩보원)이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방패를 뚫은 놀라운 ‘첩보 성과물’에 대한 흥미진진한 뒷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지난 8월8일 개봉해 극장가를 사로잡은 영화 ‘공작’과 맞물려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 최초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난 북파 공작원 박채서 씨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 영화 ‘공작’의 관객수는 개봉 15일 만인 지난 8월23일 기준으로 434만 명을 돌파했다.    

 

국정원 저격수와 대북공작원
책에는 김정일이라는 최고의 공작목표에 접근한 특수공작원 박채서가 공작목표에 성공하고도 첩보원 신분을 박탈당해야 했던 정치권의 비정한 뒷이야기, 1997년 15대 대선정국에서 공작원 박채서가 위험을 무릅쓰고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북풍공작’ 움직임에 쐐기를 박아, DJ 대통령 당선의 숨은 ‘공신’이 된 이야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책갈피를 넘길수록 그동안 보았던 첩보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첩보 비화에 빨려들게 한다.


영화와 도서 <공작>은 1990년대 후반 격동의 시간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하는 것과 동시에 2018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대변혁 기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풍향계의 역할도 해낸다.


또한 동시대 언론계의 기자 ‘사수’였던 작가 김훈이 추천사에서 “김당은 사실의 아들(the son of facts)이다”고 언급할 만큼, 긴박하고 비정한 첩보세계로 독자를 이끌어줄 생생한 논픽션 기록물이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북풍공작’에 휘말려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던 특수공작원 흑금성이 20년 만에 밝힌 첩보영화보다 더 스릴 넘치는 첩보공작의 내밀한 세계를 파헤친 책이다.


‘국정원 저격수’로 널리 이름을 떨친 김당 탐사취재 전문기자가 이중스파이 흑금성 박채서의 육필 수기를 토대로 재구성한 이 책은 여느 자서전이나 회고록과 큰 차이점을 보인다. 국정원에서 해직되어 ‘국가의 울타리’를 벗어난 흑금성이 간첩죄로 6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대학노트에 써 내려간 육필 수기를 제3자(김당 기자)의 검증과 규명을 거쳐 그 당시 벌어진 주변 상황까지 입체적으로 조명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주인공 ‘박채서’와 그의 ‘상대역이자 관찰자’인 김당 기자의 시점이 교차하는 방식을 통해 20세기 말 한반도를 관통한 역사적 사실들을 재해석해낸 점이 돋보인다.

 

이중 스파이 흑금성의 시크릿 파일
박채서는 1977년 육군 3사관학교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 현실의 벽이 높음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두환의 12·12 쿠데타로 육사 출신이 카르텔을 형성했다. 대한민국 육군 내에서 3사 출신의 출세길은 닫혔다. 새로운 길은 공작단이 열어주었다.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채서 소령은 1990년 5월, 국군정보사령부 공작단 본부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뇌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부패한 상사들의 힐난을 버티다 못한 박채서는 당시 350만 원대에 달하던 모토로라 마이크로텍 폴더 휴대폰을 공작단장에게 선물해 서울 대방동의 한·미 합동 902정보대의 'A-23팀장' 직을 얻었다. 902정보대는 미 국방정보국(DIA)과 중앙정보국(CIA)의 혼성팀 ‘S.S.A.팀’과 한국 정보단의 합동 공작팀이었다.


국군 정보사 공작관 박채서 소령이 대(對)리비아 공작계획을 통해 입수한 ‘방공호 위치 정보와 설계도’를 미국 측에 건네 카다피가 방공호에 들어간 직후 토마호크 미사일로 방공호 출입구를 강타하게 만든 것은 그의 첩보 능력 수준을 가늠케 하는 놀라운 실적이다. 이후로 그는 ‘902 한·미합동정보대’에 근무하면서 북한 핵개발 관련 첩보를 수집하는 데 열성을 다했다.


박채서는 LG산전에서 근무하던 중국 동포 김만효를 통해 김상헌이라는 중국 동포 핵물리학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박채서는 그를 포섭해 1992년 4월, 최초로 북한의 핵개발 상황을 확인했다. 1994년 6월, 한반도에 전운을 드리운 1차 북핵 위기 2년 전이었다. 


“박채서 소령이 보기에 정보사, 특히 공작단은 아직 1960~1970년대에 갇혀 사는 군상들의 집합소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간부의 상당수는 과거 북파공작 부대인 ‘설악단 B팀’(HID 무력보복팀) 출신으로, 군 복무기간의 대부분을 사회와 동떨어져 육체적 훈련으로 단련되었지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채서는 대북 공작의 한계를 몸소 체감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기껏해야 중국 동포를 활용한 공작이 휴민트의 전부라 할 수준이었다. 거짓 첩보나 역공작이 부르는 실패가 잦았다. 박채서는 대북 사업가를 통해 북한으로 직진로를 뚫으려 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지금의 국정원) 대북공작국에서는 이런 박채서를 눈여겨 봤다. 능력을 인정받은 박채서는 1995년 3월, 안기부 소속 국가공작원(정보서기관)으로 정식 채용된다.


“이미 지휘관의 길을 포기한 박채서는 ‘정보사 공작관’에서 ‘안기부 공작원’으로 변신하는 데 동의했다. 그로서는 안정 궤도에 오른 공작여건을 가진 안기부 비밀 공작요원이 되어 큰 배로 갈아탄 격이었다. 안기부로서는 정보사가 진수시켜 안전하게 항해 중인 공작선 한 척을 선장과 함께 ‘턴키 베이스’로 사들인 격이었다. 결국 공작선의 ‘마스트헤드’가 정보사에서 안기부로 바뀐 셈이었다.”


이후 박채서는 군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뛰쳐나온 ‘남조선의 부적응 장교’, ‘상급자와 자주 마찰을 빚은 조직에서 다루기 힘든 인물’, ‘육사 출신 상급자와 금전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불명예 전역한 장교’ 등으로 철저하게 신분세탁을 한 다음, 아자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의 전무로 위장취업해 대북공작에 뛰어든다.
자신의 공작명 ‘흑금성’은 1998년 ‘이대성 파일’이 유출되어, 자신이 그 공작명으로 활동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1997년 대선정국 위험 무릅쓰고 신한국당 북풍공작에 쐐기

안기부에서 해고당한 그에겐 3억의 위로금과 비아냥만 남아

 

▲ 흑금성 박채서씨는 영화 속 스토리처럼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갖고 있던 고가의 골동품을 팔아주는 일에도 나서게 된다. 사진은 영화 '공작' 속에 등장하는 김정일 별장 모습.    

 

김정일과 만난 최초의 스파이
흑금성 박채서는 김정일에게 언제든 독대 보고할 수 있는 ‘부총사장’이라는 고위층에게 ‘짝퉁 롤렉스’ 시계(부총사장 자녀들의 결혼 예물용)를 선물해 북한과의 광고사업을 단숨에 물 흐르듯 뚫어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또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갖고 있는 고가의 골동품을 팔아주는 일에도 나서게 된다.


그렇게 해서 북측 국가안전보위부장과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신임을 얻은 그는 마침내 공작의 최종 목표인 김정일과 단독면담을 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


“북한 측 ‘포대갈이’ 사업 관련자들은 장성택 씨의 아들이 연금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호떡 집에 불난 듯 야단법석이었다. 박채서는 어둠 속에서 혼자서 미소를 지으며 불구경을 했다. 그러다가 최후통첩 10일을 하루 앞둔 마지막 날에 서재호를 앞세워 남은 물품 대금을 정리해 주었다. 박채서는 이로써 장성택 일가에 큰 빚을 안기며 북한 수뇌부에 다가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하나 걸쳐 놓았다.”


“50대 남자는 자신을 ‘리인’이라고 소개하고, ‘조선노동당 조사부 베이징 책임자’라고 거침없이 신분을 밝혔다. 그는 대화를 통해 박채서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박채서가 현재까지 접촉해온 북측 인사는 물론, 추진하는 사업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


리인이라는 자는 단도직입으로 박채서에게 제안했다. ‘우리랑 같이합시다. 우리랑 손잡으면 박 선생한테 선불로 100만 달러를 조건 없이 지원하겠습니다.’ 파격적인 미끼였다. 1994년에 100만 달러는 큰돈이었다. 리인은 박채서에게 ‘선생 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김영수나 리철 같은 사람들과 일을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북측에서 박채서에게 신뢰할 만한 골동품 감정사를 대동하고 방북해 달라는 요청을 전해 왔다. 박채서가 상부에 보고하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 방북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박채서는 처음부터 북한 측 의뢰품을 감정해온 한광무 선생과 함께 방북길에 올랐다. 그들이 맨 먼저 안내한 곳은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근처의 산속 동굴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국보급 골동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북측은 남한 전문가의 감정을 통해 이 골동품 전체의 실제 거래 가격을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김영룡 부부장은 식사 중에 지나가는 말처럼 불쑥 땅 이야기를 던졌다. ‘박 선생, 부여에 사논 땅은 잘 되고 있소?’


그 순간 박채서는 ‘등골이 오싹해진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자신을 포섭하려고 찍을 때부터 철저히 뒷조사를 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테스트 관문을 통과하는 의례가 있을 것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예상도 했다. 하지만, 부여 땅만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김영룡 부부장과 함께 김정일이 들어왔다. 그는 으레 악수 정도는 할 줄 알고 일어서서 대기했으나, 김정일은 그에게 그냥 앉으라고 권하고는 상석에 가서 앉았다. 김정일은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허스키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박 선생은 의지가 굳고 대가 센 것으로 알고 있소. 부모에 대한 효심도 강하다고 하던데, 공화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신뢰하오.’”


“저들은 박채서가 북에 접근한 진의를 파악하려고 마찬가지로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학력과 교우 관계, 친인척 관계, 그리고 직업과 근무 행태까지 살아온 흔적을 방북 전에 샅샅이 조사하고 추적했다. 그러고도 그가 방북했을 때는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그를 시험했다. 적진에서의 활동은 늘 그의 빈틈과 허점을 찾으려는 보위부의 ‘창’과 공작원 신분을 들키지 않으려는 그의 ‘방패’가 부딪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15대 대선의 ‘마지막 뇌관’
그런 와중에 15대 대선이 목전에 다가올 즈음, 그는 북측 인사로부터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측이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1996년 4·11 총선 때처럼 ‘북풍공작’을 벌이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흑금성은 이 사실을 DJ측 국민회의에 알려 DJ 대통령 당선의 ‘숨은 공신’이 된다.


“‘베이징에 상주한 100여 명의 북한 공작원’은 다소 과장되었지만, 장석중이 파악한 북한의 정세 판단과 대선 개입 의도는 대체로 정확했다. 한성기는 다시 한 번 ‘총격 요청 카드’를 역설했다. 도서 <공작> 속에는 특히 15대 대선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음모와 야합 등 ‘적폐’ 세력들의 비열한 이야기들도 신랄하게 드러난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답보상태에 있으니,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4·11총선 때처럼 판문점에서 무력시위가 있어야 합니다. 홍보가 중요하므로 사전에 북측과 약속된 지점에 미리 카메라를 설치해, 북측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내려오는 장면을 실감 나게 찍어 뉴스 속보로 방영하면 국민에게 충격이 그대로 전달되어 효과가 극대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대성 파일’이 공개되면서 그의 공작원 신분이 만천하에 드러나 고초를 겪다가 1998년 8월 국정원에서 해직되고 만다. 성공한 공작원이 조직으로부터 ‘팽(烹)’ 당한 것이다.


“‘이 과장한테서 들었겠지만, 회장님의 뜻을 직접 전하기 위해 보자고 했소. 윤형이 나라를 위해 기자회견을 해준다면, 무역업체 인수 및 경영을 보장해주겠다고 하십니다.’ ‘회장님’은 권영해 부장을 지칭하는 은어였다. 윤홍준이 거듭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의욕을 보이자, 김은상은 이대성 실장한테서 받은 1만 달러를 경비조로 건넸다. 윤홍준은 다음날인 12월10일 오전 주 상무에게 전화해 베이징으로 출국한다고 알렸다.”


“밤샘 조사는 이튿날 오전 4시에 일단 끝났다. 권영해는 조서에 대한 확인과 몇 군데 수정작업을 거쳐, 마지막으로 서명 날인만 남겨둔 상태에서 4시 40분쯤 화장실에 갔다. 그리고 5분 뒤에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피 냄새가 화장실 밖으로 퍼져 나왔다. 권 부장이 커터 칼날로 배를 긋는 자해를 했던 것이다. 요란한 파열음은 그가 자해를 한 뒤에 변기를 깨서 난 소리였다. 자해에 사용한 커터 칼은 그의 성경책 속에 있던 거였다. 자해 소동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권영해에 대한 구속은 4월2일로 지연되었다.”


“만일 그가 국정원·검찰의 주장대로 ‘대남공작원’이라면, 국정원은 그런 사실을 통일부에 통보하고, 통일부는 ‘공작원 리호남’과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려는 남한 사업가들에게 경고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통일부가 리호남의 정체성과 관련해 대북사업자들에게 ‘공작원이니 접촉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낸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안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여전히 ‘제2, 제3의 간첩 박채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검찰은 북풍 사건 수사 발표에서 사실상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했다. 그가 처음에 국민회의 쪽에 ‘북풍’을 막기 위한 양심적 제보자로서 접근했는데, 나중에 정동영?천용택 의원과의 접촉 사실이 안기부에 포착되자 국민회의와 접촉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국민회의와 북측 간에 연계가 있는 양 안기부에 허위로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첩보원 신분 잃고 비선 활동

해고당한 그에게는 3억 원이라는 위로금과 다음과 같은 비아냥만 전달되었다.
“3억 원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대치니, 나머지는 당신이 도와준 정권에서 받으시라.”


도서 <공작>에는 ‘북풍공작’에 휘말려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특수공작원 신분을 박탈당한 흑금성 박채서가 13년 남짓 노무현·이명박 정부 아래서 비선(秘線) 활동을 했던 비화가 흥미진진하게 담겨 있다. 첩보원 신분을 잃었지만, 국익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첩보원보다 더 철저하게 국익을 위해 뛰었던 그가 얻어낸 소중한 정보들은 자신이 소속해 있던 국정원 일부 사람들의 방해 공작으로 성사 단계에서 아쉽게도 결실을 보지 못한 프로젝트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개성공단 조성의 필요성과 그 성공 효과를 정책 홍보하여 국민적 호응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개성과 휴전선 사이의 북한군 소개(疏開)나 전략적 주(主)진격로 상의 공백, 남북의 평화회랑 조성은 애초에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국은 개성공단 조성사업이 오히려 그들의 세계 전략인 중국 봉쇄정책과 대한반도 전략에 부정적 결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했다.”


비선 활동 중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으로 국정원 조직을 발칵 뒤집히게 만든 일들이 빌미가 되어, 그는 몇 년 후 이명박 정부 하에서 간첩죄로 체포되어 6년이라는 긴 세월 옥살이를 하게 된다. 박채서는 옥중에서 자신이 노무현·이명박 정부에 걸쳐 대북비선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비화를 대학노트 4권에 담았고, ‘국정원 저격수’로 이름을 떨친 탐사보도 전문 김당 기자가 그의 육필 수기를 토대로 재구성하게 된다.


“국정원에서 해고된 공작원이 사회에 나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중국에 가서 사업을 모색하는 한편으로 한때 자신의 보위부 연락책이었던 리철을 통해 ‘아자 전무’ 직함으로 추진했던 북한 전역에서 5년 동안 독점 TV 광고를 촬영하는 사업을 재추진해 삼성전자의 휴대폰 광고를 찍는 수완을 발휘했다. 또 리철의 주선으로 이산가족 개별 상봉을 주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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